2010년 11월 12일 금요일

성경-바빌론전쟁-성경 에스라서 1장

<성경 속 가나안족속- canaan의 후손들>

-신약성경 속에서 사마리아인들이 특별한 이름으로 늘 비유적으로 사용되듯이, 구약에서도 유별나게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민족 이름이 가나안족속이다.바로 오늘날의 현대문명의 뿌리이기도 한 가나안족속 그들은 누구인가?

-그리스어,로마어,영어 알파벳의 뿌리
-해상문명(영국),상업화,물질문명의 뿌리,
-전쟁영웅담,대량학살극,대제국을 향한 제국주의적 정복욕의 화신

-창세기9장18절 :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셈과 함과 야펫이다. 함은 가나안의 조상이다.-창세기10장6절: 함의 아들은 에티오피아, 이집트, 풋, 가나안이다.-창세10장15절부터:가나안은 맏아들 시돈, 히타이트,여부스족, 아모리족, 기르가스족,히위족, 아르케족, 신족,아르왓족, 체메르족, 하맛족을 낳았다. 그 뒤에 가나안족의 씨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갔다.가나안족의 경계는 시돈에서 그라르 쪽으로 가자까지 이르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츠보임 쪽으로는 레사에 이르렀다.





<위키백과>

키루스 2세 또는 키루스 대왕 (고대 페르시아어: Kūruš, 바빌로니아어: Kuraš, 엘람어: Kuraš, 아람어: Kureš, 히브리어: כורשKoreš, 라틴어: Cyrus,페르시아어: کوروش بزرگ ), (기원전 576년 또는 기원전 590년경 ~ 기원전 530년)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황제이다. 그는 이란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다. 성경에는 고레스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인의 지도자로서, 나누어져있던 2개의 이란왕국을 통합하고 페르시아 제국의 기초를 세웠다. 그의 치세 동안 페르시아는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당대의 제국들 -메디아, 신 바빌로니아, 리디아 제국을 굴복시켰고 이집트만 정복하지 못했는데 이집트 정복을 시도하다가 죽었지만 나중에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 정복에 성공하였다.







<사이언타임즈>


날씨에 울고 웃은 키루스 대왕난공불락 바빌론 함락과 인도정벌의 실패2010년 08월 26일(목)



기후와 전쟁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성경 에스라서 1장에는 고레스 왕이 유대인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바사는 페르시아를, 고레스는 키루스 왕을 뜻한다. 키루스 왕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냈다. 많은 역사학자는 성경에 기록된 이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고고학자 H. 라삼이 바빌론 성 발굴작업 중 원통형 비문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원통형 비문 안에는 키루스 대왕이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향을 허락한 내용이 기록돼 있었다. 키루스 대왕의 바빌론 정복과 업적들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서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해 아케메네스(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왕이다. 기원전 547년 키루스 대왕은 리디아 정복에 나섰다. 팽팽히 맞서던 양군은 사르디스 동쪽의 작은 벌판에서 대치했다. 리디아의 기병이 강함을 파악한 키루스 대왕은 군사의 대열 앞에 낙타들을 배치했다. 리디아군의 말들이 낙타들을 보고 혼란에 빠지면서 승리를 잡아챌 수 있었다. 전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키루스 대왕의 책략이 돋보이는 전투였다.

기원전 541년까지 이란 지역을 거의 정복한 키루스 대왕은 바빌론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바빌로니아는 벨사살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벨사살 왕은 렘브란트 등의 화가들이 그의 연회 장면을 그릴 정도로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했던 왕이다. 부귀와 사치 속에서 산 오만한 왕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무리 그들이 강하다고 해도 이 바빌론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다” 벨사살 왕의 말처럼 바빌론 성은 견고했다. 수심도 깊고 폭도 넓은 유프라테스 강이 성을 둘러싸고 흘렀다. 천연적인 자연방어선과 함께 고대 성 중에서는 가장 높고 견고한 성벽이 바빌론을 둘러싸고 있었다.

▲ 키루스 대왕의 아케메네스(페르시아) 제국 영토.

난공불락 바빌론 공략 비결은 ‘물’

키루스 대왕이 공격에 공격을 거듭했으나 도저히 바빌론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그래, 이 무더위에 물이 없다면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키루스 대왕은 날씨를 이용하기로 결정한다. 바빌론 지역은 5월부터 10월까지는 건기로 비가 전혀 오지 않는다. 세계에서 가장 무더운 지역으로 7월에서 9월까지는 낮 최고기온이 50도를 넘을 정도로 폭염이 기승을 부린다. 물이 없이는 잠시도 생존하기 어려운 곳이다. 바빌론 성은 건기 계절 동안은 유프라테스 강에 연결돼 있는 수문으로 물을 충분히 공급받았다. 그러기에 가뭄이나 식수 공급 제한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다.

키루스 대왕은 강물의 줄기를 바꿨다. “벨사살이 대연회를 베풀고 있는 사이, 바빌론을 관통해 흐르던 유프라테스 강은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성벽 밖에 건축된 대참호 속으로 돌려졌다”(역사가 헤로도투스) 강의 물줄기를 돌림으로써 바빌론에 공급되던 식수가 봉쇄됐다. 건기로 비가 전혀 내리지 않는 데다가 강으로부터 물이 공급되지 않자 기근이 바빌론을 휩쓸었다. 무더위와 기갈로 병사와 시민들이 쓰러져갔다. 항복 외에는 선택이 없었다.

키루스가 바빌론에 입성한 것은 기원전 539년 10월 29일이었다. 우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날씨를 이용한 전술적 쾌승이었다.

전투조차 못하고 날씨에 패배한 인도정벌

키루스 대왕은 무수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의 전쟁 기록 중에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 적이 있다. 바로 인도정벌 전쟁이다. 인도원정 루트로 게드로시아 사막을 선택했다. 사막 기후는 너무나 참혹했다. 밤에는 뼈까지 스며드는 강추위, 낮에는 견디기 힘든 무더위, 강력한 모래바람은 수시로 불어왔다.

물과 식량 보급이 제때 이뤄지지 않았다. 풍토병과 기근으로 병사들이 쓰러져갔다. 인도 정복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키루스 대왕이 바빌론으로 돌아왔을 때 살아온 부하는 겨우 일곱 명뿐이었다.

인도와 전투조차 하지도 못하고 날씨에 대패한 전쟁이었다. 키루스 대왕에게 치명적 패배를 안긴 게드로시아 사막은 알렉산더가 인도원정에서 돌아올 때도 엄청난 병력 손실을 안긴 악명 높은 사막이기도 하다.
제공: 국방일보 |

글: 반기성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연구원

저작권자 2010.08.26 ⓒ Science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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